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옷소매 붉은 끝동의 주인공인 정조 이산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정조 이산 / 정조 가계도
출생 : 1752년 10월 28일
즉위 : 1776년 4월 27일
사망 : 1800년 8월 18일
한국 역사의 마지막 명군인 조선 제22대 왕이자 성군이었다. 영조 28년 혜경궁 홍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형이 태어나기 전에 일찍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큰아들이었다.
1762년 아버지 영조에 의해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살해당하자 영조의 장남인 효장세자의 후계자가 되었다. 1776년 영조가 죽자 25세에 즉위해 24년간 재위하다가 1800년에 사망했다.
그는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조선 왕조의 마지막 부흥을 이끈 왕으로 평가받는다.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많은 이야기를 남겼고, 많은 예술 작품을 탄생시켰다.
1-1. 정조대왕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가계도
사도세자는 영조의 과도한 억압적 교육으로 각종 정신질환을 앓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첩과 후궁을 실제로 살해하는 등 유교 사회에서 왕이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정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영조가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지만, 정조가 죄인의 아들이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정식으로 사도세자를 죽이지 않고 일주일 만에 굶어 죽게 만든다.
2. 정조 안경
정조는 시력이 좋지 않아 안경을 썼다. 정조실록에는 즉위 23년째부터 시력이 나빠 안경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시력이 예전보다 점점 나빠지고 있어 안경이 아니면 성경의 문제를 인식하기 어렵지만, 안경은 건국 이래 처음이라 안경을 쓰고 법정에서 국정을 처리하면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2. 정조 의빈 성씨 / 정조 성덕임
정조의 첫사랑으로 알려진 의빈 성씨는 성덕임이라고 불린다. 정조의 측실 중 유일한 승은을 입은 측실이며, 정조는 그녀를 15년 동안 기다려야 했다.
1766년 정조가 의빈 성씨를 첩으로 삼으려 하자 의빈 성씨는 "죽음을 각오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며 울면서, "세손빈은 아직 자식이 없는데 자신이 첩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조가 의빈 성씨 신하를 처벌하자 의빈 성씨는 결국 뜻을 굽혀 후궁이 되었다.
3. 정조와 정약용
정약용(鄭若鏞)의 다산 시집에 따르면 정조가 시를 짓는 시험을 치렀고, 시를 짓지 못한 관료들을 창덕궁 부용지(芙蓉池) 한가운데 있는 둥근 섬으로 추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조대왕의 영정을 보면 평온해 보이지만, 후대의 이길범 화백이 표준 초상화로 그린 상상이다. 실제로 정조의 아들의 회상에 의해 그려진 정조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매우 강인하고 힘센 사람인 것 같다.
4. 정조의 죽음
정조는 조선의 왕들이 앓았던 만성 유전병인 농양을 앓다가 말년에 농양으로 사망했다. 이는 당시 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한밤중에 잠시 잠을 자다가 자연히 배에 고름이 들어와 침대 옆으로 퍼져 짧은 시간에 나온 것의 몇 배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더운 여름날에 고름이 많다고 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심각한 상태에서도 정조는 당시 의료기술이 미흡해 인삼이 들어간 한약만 먹고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4. 정조는 천재다
각 기록을 보면 정조가 신하들에게 "나는 매우 똑똑한데, 너희들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정조는 모든 경전을 완벽하게 암기한 조선시대 유일한 왕이다. 정조는 책을 읽을 때까지 책을 깊이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자들은 정조의 해외 유학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정조대왕이 시행한 초기 문신 제도 자체는 전례가 없었고, 이 제도의 주체가 완전히 제동을 걸지 못했다는 사실은 정조대왕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 증명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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